의대에 재학하던 시절 정신과 수업을 듣는데, 한 교수님이 퀴즈를 냈다.
"정신과와 다른 과를 나누는 아주 쉽고도 중요한 기준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니?"
"정신과에는 미친 사람이 오고, 다른 과에는 멀쩡한 사람이 온다는 거죠."
"정신과는 마음을 다루고, 다른 과는 몸을 다룹니다."
우리는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교수님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여러분들의 대답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할 때 가장 분명한 차이는 일반 병원을 찾는 환자들은 '살려 주세요'라고 도움을 청하러 오지만, 정신과를 찾는 환자는 '죽고 싶다'며 찾아온다는 것이다. 환자들의 지향점이 180도 다르다."
자살은 생각보다 흔하다. 특히 20~30대에서는 사망 원인 1위이고, 15~19세 사이에서는 2위다.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15~19세 사이의 청소년 사망 원인의 3위가 자살이다(참고로 미국의 경우 2위는 타살이다). 암과 같은 불치병은 현대 의학의 발전과 함께 사망률이 급속도로 낮아지고 있고, 교통사고와 같은 사고사도 안전 수칙을 준수하면 예방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자살만은 당사자가 자의적으로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에 예방하기가 쉽지 않다.
청소년기의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자살
임상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만났지만,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 나를 찾아온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 이틀 전에 집을 나갔다가 지친 모습으로 귀가했다. 죽으려고 돌아다녔는데 마지막에 용기가 없어서 그냥 돌아왔다고 어머니에게 고백했다. 학교를 빼먹거나 특별히 우울해 보이지 않았던 딸의 말에 놀란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알고 보니 2~3년 전부터 항상 우울한 기분이 들었고,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래서 뛰어내릴 장소를 물색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매번 용기가 없어서 주저했는데, 최근 더욱 마음이 괴로워지면서 힘들고 괴로운 기분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이 자살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어 충동적으로 거리를 헤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약물 치료와 상담을 거치면서 우울증은 상당히 호전되었다. 그러나 가끔씩 기분이 가라앉거나 친구와 다투거나 하면 갑자기 자살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고 한다.
이렇게 청소년기의 자살은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경우가 많다. 심각한 죄의식이나 우울감보다는 성적 비관, 일상적 말다툼, 생활상의 스트레스 등이 원인이다. 그래서 성인에 비해 자살 시도를 10배나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그에 비해 실제 죽음에 이르는 비율은 낮다. 특히 여자가 남자보다 4배나 많이 시도하지만 실제 사망률은 큰 차이가 없는데, 여자는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남자든 여자든, 현재의 일상적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서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노력이 1차적인 이유다. 일상적 스트레스가 여러 가지 겹칠 때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폭발적으로 위험한 행동을 저지르기 쉽다는 것이 청소년기 자살의 특징이다. 자살에 대해 생각하거나 행동에 옮긴다는 것은 그만큼 스트레스를 겪고 힘들어 한다는 징후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처음에는 그저 막연하게 생각만 하다가 그 생각이 잦아지면 방법과 계획을 떠올린다. 점차 생각은 정교해지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단계까지 간다. 이 단계까지 가기 전에 여러 번 멈출 수 있다. 그러나 자살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 이식되고 나면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극복하거나 없애기가 쉽지 않다. 여러 번 생각을 접고 마음을 돌리지만, 만에 하나 안 좋은 일이 겹치면 가속도가 붙으면서 결행하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자극에 대한 역치1)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자살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
그렇다면 왜 자살을 할까? 가장 유명한 것은 사회학자 뒤르켐(Emil Durkheim)2)의 이론이다. 그는 자살에는 이기적(egoistic), 이타적(altruistic), 붕괴적(anomic) 자살이 있다고 말했다. 집단과의 결속이 없어져 버린 개인이 견디지 못하면 이기적 자살이고, 논개와 같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생명을 던지면 이타적 자살이다. 붕괴적 자살이란 한 사회가 다른 구조로 변화될 때 이에 적응하지 못한 개인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낙오되거나 희생된 많은 이들의 자살이 이 유형에 속한다.
무너진 영혼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 본문 이미지 1
한편 개인적인 심리의 관점에서 프로이트는 외부 대상으로 향했던 사랑이 공격성으로 변해 자신을 향해 일어나는 것이 자살이라고 해석했다. 밖을 향해 쏘려던 총구를 자신을 향해 돌린 셈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환상이 기여한다.
첫 번째가 복수 환상이다. 자신이 죽으면 다른 사람들이 미안해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존심에 입은 상처를 자기 파괴적인 복수로 보상받으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징벌 환상으로, 복수 환상과는 정반대로 자신이 너무나 나쁜 짓을 저질렀다고 자책한 나머지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고 여기고 스스로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세 번째는 재결합 환상으로 노인들에게 흔한데, 배우자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나면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사후 세계에서 그들과 재결합하려 시도한다. 네 번째는 리셋 환상이다. 컴퓨터가 잘 돌아가지 않으면 리셋 버튼을 눌러 새로 시작하면 되듯이, 마찬가지로 인생이 너무 꼬였다고 여기면 자살을 일종의 리셋 버튼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새로 캐릭터를 만들어 시작하면 된다는 생각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런 환상들은 삶의 의미를 부정하고, 현재 겪는 스트레스에서 도망치거나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일 뿐이다. 결국 실제로 왜 그랬는지는 아무도 모를 만큼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한다.
사회적인 변화도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 길리건(James Gilligan)이라는 정신과 의사는 자살과 살인을 치명적 폭력(lethal violence)으로 규정하고, 실업률과 빈부의 격차가 증가하면 치명적 폭력의 발생률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도 1998년 IMF 사태로 실업률이 급격히 올라갔을 때 일시적으로 자살률이 올라갔다. 사회적 환경이 나빠지면 수세에 몰린 사람들이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아니면 '동반 자살'이라는 부작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살을 시도했던 사람들이 다시는 시도하지 않도록 보살피는 것이다. 1명의 자살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 사람의 자살은 주변의 6명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다. 모 탤런트가 자살한 후에 동생마저 자살한 사건을 봐도 그렇다. 이렇듯 연쇄적인 비극의 도미노를 막으려면 자살 시도자와 자살 성공자의 주변인을 잘 돌보아야 한다. 특히 자살 시도자의 30퍼센트가 1년 내로 또다시 자살을 시도한다.
가장 흔한 자살의 원인은 치료되지 않은 우울증이다. 우울증이 있는 경우 자살에 대한 생각이 건강한 사람의 4~5배로 증가하고 생활상의 스트레스나 음주 문제 등이 겹치면 그 위험도는 급상승한다. 한 연구에서는 자살한 사람을 대상으로 심리적 부검(psychological autopsy)3)을 하면 75퍼센트가 우울증이라고 했을 정도다. 더 나아가 자살 시도자의 우울증을 발견해서 적극적으로 치료하면 자살을 재시도하는 비율을 80퍼센트나 줄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자살과 우울증은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치료를 받는 사람은 여전히 소수다. 외국의 보고에 의하면 자살 사망자의 3분의 1만이 항우울제를 복용했고, 3퍼센트만이 치료적 용량의 항우울제를 복용했다. 약물 치료를 동반한 적극적인 우울증 치료는 자살 위험을 낮추는 데 매우 효율적이지만, 자살을 시도할 위험이 있는 9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치료받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적극적인 치료와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자살 예방의 중요한 전략이 된다.
한편 자살은 전염성이 있다. 특히 유명한 사람이 자살하면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나는데, 이를 '베르테르 효과'라고 한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이 권총 자살을 했는데 그 후 유럽의 젊은이들 사이에 권총 자살이 늘어났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1974년 미국의 사회학자 필립스(David Phillips)가 이름 붙였다. 그는 20년 동안 자살을 연구하면서 유명인의 자살이 언론에 보도된 뒤 자살률이 급증했다는 사실을 토대로 이 연구 결과를 이끌어 냈다. 2005년 한 여배우가 자살한 지 2달 후에 자살자가 평균 기대치인 2,073명보다 많은 2,568명으로 늘어났고, 2008년 또다른 여배우의 자살 후에는 3,081명으로 1,000명이나 더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만큼 유명한 이들의 자살은 대중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울고 싶은 아이의 뺨을 때리는 셈이다.
자살을 어떻게 막을까?
주변에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잘 살펴보면 자살을 시도하기 전에 주변에 자신의 의지나 고통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주변에서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가면 비극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주변에서 그런 신호를 보내면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치료를 받게 하거나 가족에게 알려야 한다. 어느 정도로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또 유서를 남겼는지, 얼마나 자주 그런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면 어두운 그림자가 그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뒤덮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이후에는 응급적 중재를 위한 계획을 세운다. 이는 생활상의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을 분산하고 자살 행동까지 가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또한 특정한 상황, 정서적 반응이 자살 행동으로 이어지거나 과거의 시도로 이어지는지 분석해서 통제 못할 상황으로 진행되는 것을 막고, 분노, 좌절, 상실에 대해 파괴적이지 않은 다른 해결책을 제공한다. 더 나아가 가족과 상의하여 위험한 약품, 흉기 등을 보이지 않는 장소에 숨겨 놓는 것도 간단하지만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자살이 모든 일의 해결책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자살은 무책임한 행동이다. 본인은 모두 끝났으니 속 시원할지 몰라도,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평생 짊어져야 할 상처를 남기는 셈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자살에 성공하지 못한 경우, 심각한 신체적·정신적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는 것도 자살의 부작용이다.
앞으로 해야 할 일도, 경험할 것도 너무 많은데, 현재 겪는 일상적인 스트레스와 대인관계의 어려움, 학업 성적처럼 지나고 나면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일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즉흥적이고 충동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결심을 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자살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중간에 책을 덮는 행동이다. 인생이란 소설은 끝까지 가 보지 않으면 희극인지 비극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인지, 조연인지도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처음 몇 쪽 읽고 별로라며 덮어 버리기에는 인생이란 소설에 흥미로운 구석이 너무나도 많다.
각주
1)역치 : 생물이 외부 환경의 변화, 즉 자극에 대해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로, 역치값 미만의 세기로 자극이 오면 더 이상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출처 : 무너진 영혼의 돌이킬 수 없는 선택 - 자살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2012. 6. 30., 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