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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9-22 10:58
청소년 우울증 - 무기력한 것도 병이 될까?
 글쓴이 : 한국청소년…
조회 : 17,697  

요즘 청소년들은 우울하다. 매년 바뀌는 대학 입시 제도 때문에 시험 준비하느라 정신없고, 학교 수업을 마치면 야간 자율 학습을 하거나 학원에 가야 한다. 친구들과 마음을 터놓고 싶어도,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왕따가 될지도 모른다. 어느새 입에서는 "아, 우울해"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돌이켜 보니 행복했던 시간은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갖다준다고 믿던 순진하기 그지없던 어릴 때뿐인 것 같다. 어찌어찌해서 대학에 들어간다고 해도 인생은 행복해질 것 같지 않다. 취업이 안 되어 고생하는 형이나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고 집에서 화풀이하는 아버지를 보면, 눈을 감는 그날까지 우울함은 가시지 않을 것만 같다.

그런데 '우울'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잘 대답할 수 있을까? '기분 나쁜 것', '처지는 것', '슬픈 마음', '짜증나는 것'이라고 대답하겠지만, 막상 우울함, 우울증에 대해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도대체 '우울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울함의 본래 역할

우울증이 아닌 우울한 감정은 누구나 느끼는 기분이다. 왜 우울한 것일까? 인간에게 쓸데없는 감정이란 없고, 우울한 감정도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울함은 위험을 감지할 수 있도록, 안 좋은 일이 벌어질 테니 조심하고 대비하며 긴장하도록 모니터링하는 것이다. 우울하면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일이 잘되었을 때보다는 잘되지 않았을 때의 결과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 과정을 거치며 더욱 신중해지고, 만에 하나 있을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듯이, 무엇이든 지나치면 좋지 않다. 우울한 감정을 동원하여 주변을 경계하는 것은 좋지만, 이 시스템이 지나치게 작동하게 되면 부정적인 관점을 우선시할 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러면 우울증이 온다.

우울증적인 감정 시스템에 잘 빠지는 사람, 즉 우울증에 취약한 기질이 있다. 클로닝거(Robert Cloninger)라는 미국의 정신과 의사는 기질을 네 가지로 분류했는데, 이것은 독립적이고 배타적으로 유전되며 생리적, 생화학적으로 각기 다른 특징을 갖는다고 했다. 그중 세로토닌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과 관련된 '위험 회피성(harm avoidance)'이 우울증과 연관이 있다. 위험 회피성이 높으면 수줍음이 많고 외부의 평가에 예민하다. 항상 긴장하고, 위험을 감지하는 데 민감하다. 그래서 치료가 필요한 수준의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많다.

흔히 우울증은 과거에 마음의 상처를 입어서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똑같은 사고를 당하고도 한 사람은 우울증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같은 후유증을 앓는 데 반해 다른 사람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금방 털고 일어나 일상생활로 복귀하는 경우, 이는 기질적 차이에서 비롯된다.

내면을 향한 공격성

정신 분석학적으로 우울함은 '내면을 향해 총구를 돌린 공격성'으로 설명한다. 어떤 상황에 대해 화가 나고 부당한 일에 대해 분노를 표현하는 원초적 공격성은 누구나 갖고 있다. 그래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화를 내고 소리 지르고 나면 속이 후련해진다.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 공격성의 총구가 외부가 아닌 자신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남 탓만 해도 문제이지만, '내 탓이오'라며 자책하고 모든 일이 자신으로 인해 벌어졌다고 여겨서 자신에게 공격성을 분출하는 것도 문제다. 결국 내면은 만신창이가 되고 자긍심은 땅으로 떨어져서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자괴감만 남는다.

인간에게는 '어떤 것을 하고 싶다, 이루고 싶다'는 이상적인 목표가 있는데, 자신의 모습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도저히 달성할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에 직면하면 우울감이 커진다. 반에서 하위권에 있으면서 명문대에 들어가겠다는 실현하기 어려운 목표를 세웠다면 우울감의 원인이 된다. 자신이 갖고 있거나 성취한 것은 보지 않고 갖고 있지 못한 것만 바라거나, 남과 끊임없이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끼고 자신이 못하고 있다고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은 목표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넓히는 주범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은 괜히 잘난 척하지 말라는 사회 문화적 규범을 가리킨다. 그러나 '익지도 않았는데 고개부터 숙이고 보는' 것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게 하며, 우울하고 위축된 정신세계를 형성할 뿐이다. 무엇보다 '나는 소중하다'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상처받고 무슨 일이든 꼬이기만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나빠지고 우울해질 수밖에 없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튼튼해서 안 좋은 일이 하나 정도라면 힘들어도 견뎌 낼 수 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면 어떨까?

60세 할머니가 진료실에 찾아온 적이 있다. 작은 의류 회사를 가족들과 함께 경영하고 있었는데, 최근 납품하던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많은 손해를 보게 되었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기에 힘들었지만 견딜 만했다. 그런데 아들이 갑자기 이혼했다면서 어머니와 함께 살겠다고 집으로 들어왔다. 게다가 얼마 전에 받은 건강 검진에서 당뇨병을 진단받고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3년 전에 사망했을 때에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여러 가지 일을 한 번에 당하고 나니 자신감도 사라지고 견디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서 무릎이 꺾이는 것을 느꼈다. 회사에 나가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서 넋 놓고 있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이렇게 사느니 죽는 편이 낫겠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자 병원을 찾아온 것이다. 할머니는 모든 사건이 자신의 탓이고, 이제 다 끝났으며 앞으로 상황이 나아질 만큼 좋은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상황도 절망적인데 몸도 안 좋아서 죽을 일만 남은 것 같다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는 모델 중 하나가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다. 심리학자 셀리그먼(Edwin Robert Seligman)은 상자 안에 개를 넣어 두고 전등에 불이 들어오면 바닥에 전기가 흐르게끔 장치했는데, 개는 바로 앞의 벽을 뛰어넘어 도망갈 수 있었다. 이렇게 훈련한 후에 이번에는 개를 묶어 놓았다. 전기가 흐르자 개는 도망가려 했으나 묶여 있어서 도망갈 수 없었다. 이 상황이 여러 번 반복되자, 개는 피하려는 시도를 포기해 버렸다. 나중에는 묶은 줄을 풀고 도망갈 수 있게끔 해 주었는데도 개는 도망가지 않게 되었고, 상자 밖에서의 생활도 전과 달리 활기를 잃어버렸다. 이렇듯, 도저히 도망칠 수 없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면 무력감이 학습되어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 않고 무기력해진다.

우울함의 동굴을 벗어나라

인생을 살다 보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의해 가야 할 길이 온통 진흙탕이 되어 버리고 길을 잃을 때가 있다. 이때 운명과 세상을 탓하면서 주저앉는다면 우울증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다. 물론 신중하고 위험을 예민하게 감지하므로,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넌다는 심정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조심스럽게 행동해 왔을 것이다. 이는 장점이다.

그러나 신중한 만큼 기회를 놓치기 쉽고, 실패의 경험은 남들보다 오래 남아서 삶의 속도에 제동을 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벡(Aaron Beck)이 이야기한 우울증적 사고방식이 굳어진다. '모든 불행은 나 때문에 벌어진 것'이고 '세상은 내게 불리한 방향으로만 돌아갈 것'이며, 더 나아가 '이런 진창 같은 인생사는 나아지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형성된다. 그래서 어쩌다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그럴 리 없어, 내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실수이거나 더 안 좋은 일이 벌어질 전조일 뿐이야. 기뻐해서는 안 돼'라며 제 풀에 실망하고 자신의 성취를 평가절하한다.

온통 안 좋은 일만 일어난다고 해서 신세를 한탄하며 주저앉아 우울함의 굴을 팔 것인가, 아니면 힘들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며 한발 한발 묵묵히 걸어갈 것인가? 5년 혹은 10년이 지난 후에 돌아본다면 후회스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우울함은 내면을 평가하고 실수를 막아 주지만, 어두운 본성에 사로잡히면 삶의 만족과 행복에서 점점 멀어진다. 선택은 누가 해 주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왜 이 길로 가라고 그랬어?"라고 울면서 얘기해 봤자 소용없다.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 주는 사람은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무기력한 것도 병이 될까? - 우울증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2012. 6. 30., 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