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민은 어젯밤에도 새벽 3시경에 깨어났다. 사고가 난 지 3달이 지났고 상처도 많이 아물었지만, 아직도 밤마다 그날의 사고를 꿈꾸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 식은땀에 온몸이 젖어 일어나면 다시 잠들기도 어렵다. 낮에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머리가 멍하고 집중이 안 돼서 TV에서 좋아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나와도 시끄럽게만 들린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 가슴이 두근거리기 일쑤다.
영민은 차를 타고 가다가 중앙선을 넘어온 차에 부딪쳐 크게 다쳤다. 탑승자 중에는 사망한 사람도 있었기에 식구들은 살아남은 것만도 감사히 여기라고 위로했지만, 영민은 여전히 사고가 났던 차 안에 있는 것만 같다. 병원에 가려고 차를 타도 조수석에는 절대 앉지 않고 뒷자리에 깊숙이 앉아 차창 밖도 쳐다보지 못한다. 아버지가 운전하면서 중앙선에 가까운 1차로로 차선을 변경하면 짜증을 내면서 빨리 안쪽 차선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친다. 사람이 변해 버린 것만 같다.
영민이 보이는 증상을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라고 한다. 교통사고, 전쟁, 신체 폭력 혹은 성폭력의 피해자처럼 평소 접하기 어려운 심리적, 신체적 상처를 입은 경우, 사건이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온몸과 마음이 과도하게 긴장되어서 다양한 증상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영민이 그렇듯이 악몽을 꾸거나 사고 장면이 영화의 회상 장면처럼 순간적으로 눈앞에서 재현된다. 또 사고와 연관된 자극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노력한다. 온몸이 극도로 긴장되어 잠을 잘 수 없고, 집중하기 어렵고, 예민해져서 짜증이 늘어난다. 이런 변화로 인해 예전과 달리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잘하지 못하게 되고, 시간이 지나도 좋아지지 않아서 우울해하다가 성격마저 달라진 듯 보인다.
PTSD는 많은 영화에서 인용된다. 최근에 60세가 넘은 실베스터 스탤론이 다시 한 번 등장해서 사람들을 경악시켰던 〈람보〉 시리즈를 보자. 뒤로 갈수록 극단적인 보수주의와 슈퍼맨 같은 비현실적인 활약으로 코미디처럼 되었지만, 1982년에 처음 나온 1편은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그린베레 출신의 람보는 제대 후 전우를 찾아 로키 산맥의 한적한 시골 마을로 가지만, 친구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마을의 보안관은 부랑자 행색의 람보를 체포해서 조사한다. 람보는 베트남에서 포로로 잡혀 고문당한 기억이 떠올라 미친 사람처럼 폭력을 행사한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던 포로수용소와 비슷한 상황에 처하자, 람보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PTSD는 원래 전쟁 중에 경험한 극한의 상황이 외상 기억으로 남아 생긴 다양한 증상을 일컫는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가 만든 집단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오랫동안 여러 가지 증상을 보였고, 베트남전에 참여한 미국인들이 귀국 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켰으며, 최근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의 상태가 부각되면서 이 질환이 널리 알려졌다. 게다가 현대 사회에서 생긴 다양한 사건, 사고의 피해자들도 비슷한 증상을 겪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제는 흔히 마주하는 문제가 되었다.
모든 증상에는 이유가 있다
PTSD의 특징적인 증상에는 이유가 있다. 증상은 사람을 불편하고 괴롭게 하지만, 인간이라는 개체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합리적인 면이 있다. 악몽을 꾸거나 사건을 재연한 회상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그 사건을 장악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자신이 장악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더 이상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아주 쉬워 보이는 일도 잘 모르고 익숙하지 않으면 손에 익을 때까지는 긴장하고 실수할까 봐 마음을 졸인다. 그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거듭 연습해서 빨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
김연아 선수가 대회에서 고난도의 점프를 하는 모습은 멋지고 아름답다. 부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백 번 넘어지면서 연습한 결과물이다. 오늘도 김연아는 할 수 있다는 자기 주문을 외우면서 악셀을 시도한다. 그 주문의 근거는 요행수가 아니라 수백 번의 연습이다. 뇌도 그렇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다. 그러나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는 이 사건이 다시 벌어진다면 그때에는 잘 장악해서 처음보다는 쉽게 대처하고 싶은 본능적 욕망이 작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교통사고를 당해 볼 수도, 전쟁터에 나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뇌는 기억의 저장고에 있던 사건의 장면을 되새김질하듯이 되살린다. 매번 경험할 때마다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나아질 것이라고 여긴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뇌는 반복해서 상처를 후벼 파면서 내성을 기르라고 하는데,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똑같거나 심해지는 것이다.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이다.
온몸의 자율 신경계가 항시 긴장되어 있어서 잘 때에도 이완되지 않고, 작은 일에도 잘 놀라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상도 사고와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사건이 모두 종결된 다음에도 그 여파가 워낙 커서 몸과 마음이 쉽사리 편히 쉬지 못한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공습경보 사이렌이 곧잘 울리고, 거리에 군인들이 돌아다니면서 전쟁 당시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셈이다.
그런데 긴장감은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맨체스터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는 박지성 선수는 '산소 탱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경기 시간 내내 뛰어다닌다. 그의 타고난 체력과 성실함 덕분이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상급 축구 선수들을 보면 박지성 선수와 달리, 평소에는 어슬렁거리는 것 같고 게을러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공격해야 할 때가 되면 어느새 전광석화처럼 가장 최적의 위치로 옮겨서 예측하지 못한 슛을 날리고는 다시 속도를 늦춘다. 긴장과 이완을 거치며 효율적으로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다.
큰 사고를 당하면 머리로는 안전하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과 몸은 5분 대기조처럼 완전 군장을 갖추기를 주문한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쉽사리 마음을 놓을 수 없어서 온몸에 힘을 주는 바람에, 쉽게 지치고 집중도 안 되고 곧 탈진한다. 이렇듯 트라우마(trauma)가 될 만한 사건이 고통스럽고 마음속 깊이 각인(刻印)된다. 안전지대에 있어도 "그만 쉬어"라는 구령에 반응하지 않고 "차렷" 자세를 유지하다가 쓰러지게 된다.
사람에 따라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다르고, 그 태도에 따라 결과도 다르다.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에서 생존한 사람들을 모아서 인터뷰했는데, 어떤 사람은 사건 이후 냄새 때문에 집에서 고기나 생선을 굽지 못하거나 가방에 망치와 손전등을 항상 넣고 다닌다고 말했다. 그에 비해 며칠 후부터 별다른 일이 없었다는 듯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의 차이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무척 주관적이어서, 객관적으로 매우 심각한 사건이라도 담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또 쉽게 넘어갔던 사람이라도 이웃과의 언쟁과 같은 별일 아닌 사건을 경험하고 난 다음부터 사람들과 마주칠까 봐 불안해하며 지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건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끔찍했는지 하는 것보다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니 "그런 걸 가지고 힘들어 해?"라는 식의 말은 함부로 하지 말자.
트라우마 받아들이기
PTSD의 치료는 외상에 의해 마음이 더 이상 압도당하지 않도록 조절하고, 생리적·심리적인 긴장을 늦춰 최대한 빨리 일상생활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말로 풀면 쉽지만, 실제 치료는 쉽지 않다. 환자들을 만나 보니 트라우마라는 예기치 않던 불청객도 손님처럼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내공이 있는 사람이 빨리 좋아졌다.
예기치 않던 사건을 경험하는 일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교통사고, 신체적 학대와 같이 큰 사건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 종류의 불쾌한 일을 경험하고 그 사건에 대한 기억 혹은 어떤 사람과의 갈등이 떠올라서 자꾸 괴로워질 때가 있다. 무엇보다 사건과 갈등에 압도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무조건 뱉어 내야 할 이물질로만 보고 떨쳐 내려 하거나 털어 내려 하면 더 단단히 달라붙는 속성이 있다. 떨쳐 내겠다고 손사래를 치면 실재보다 훨씬 크고 무섭고 위험한 것으로 확대되어 더욱 단단히 몸에 박혀 들면서 생생해진다. 내 안의 원초적 공포감이 사건이나 갈등에 투사되어 비현실적인 괴물로 변한다. 그러므로 애초에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를 객관화하고 거리를 두고 보면서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첫 번째 단계다. 또 사건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면 사건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인생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담대함을 보이는 것이 두 번째다.
이 두 단계를 거친다면 비현실적인 괴물로 커져 버린 사건에 압도당해 사로잡히는 일만큼은 피할 수 있다. 이것이 PTSD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인생의 태클로 힘들어 하는 일반인들에게 던져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