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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9-21 10:56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 부러지지 않는 유연한 마음
 글쓴이 : 한국청소년…
조회 : 18,388  

한적한 시골길. 지나가는 차는 한 대도 없고 주변에는 드넓은 논만 가득해서 인적조차 드문 곳인데도 어김없이 신호등은 바뀐다. 오랜만에 차가 한 대 지나가다 붉은 신호등이 켜지자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 오는 차가 없어서 무시하고 좌회전을 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경찰은 차를 세우고 신호 위반을 지적하며 면허증을 내놓으라고 한다. 급히 가야 할 곳이 있어서 그랬다면서 한 번만 봐 달라고 사정하지만, 경찰은 면허증을 내놓으라고 재차 말한다. 그제야 운전자는 신분을 밝힌다.

"내가 이번에 새로 부임하는 서장인데······."

그런데도 교통경찰은 우렁차게 경례한 후 딱지를 뗀다. 서장에게 찍힌 교통경찰은 결국 인생이 꼬인다.

영화 〈바르게 살자〉의 도입부다. 주인공 정도만은 정도()가 아니면 가지 않는 사람으로 고지식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다. 경찰을 천직으로 알고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잡기 위해 노력하지만, 경찰 내부에서도 융통성 없는 성격은 골칫거리다. 그 덕분에 원래 형사였다가 교통경찰로 좌천당하기까지 했다. 이 영화는 지지리도 융통성 없는 사람이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어려움을 모의 은행 강도라는 상황에 펼쳐 놓은 풍자 코미디다.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하면 좋은 사람 같지만, 가까이 지내다 보면 옆에 있는 사람은 답답하고 분통이 터져서 견디기 힘들 때도 많다. 길 건너 가게에 가야 하는데, 짐도 많아서 힘들다고 하자. 그런데 횡단보도가 없어서 200미터 전방에 있는 지하도로 건너야만 한다. 마침 오가는 차는 보이지 않는다. 정도만 같은 사람이라면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200미터를 걸어가서 지하도를 건널 것이다. 무단횡단이 큰 죄도 아니고, 차가 다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정해진 규칙은 힘들더라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이런 사람의 신념이다. 그 사람이야 그렇게 살든 말든 상관없지만, 행여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난처하지 않을까? 힘들어 죽겠으니 이번만 그냥 건너자고 설득하려 애쓰지만, 곧 포기하고 그를 따라 먼 길을 돌아가면서 "너랑 다시는 같이 안 다녀"라고 굳게 결심할지도 모른다. 이 사람들은 병이라도 걸린 것일까?

고지식함 vs 융통성

누구나 지켜야 할 규칙이 있고, 규칙을 지켜야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렇지만 규칙만 고집하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누구나 융통성을 발휘할 때도 있고, 절대 타협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인간에게 융통성은 어떤 의미이고 어떤 식으로 발달하는지 살펴보면, 고지식함이라는 답답한 사고 체계의 순기능과 부작용을 이해할 수 있다.

융통성은 "그때그때의 사정과 형편을 보아 일을 처리하는 재주, 또는 일의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하는 재주"라고 정의된다. A라는 상황에 A1으로 반응했는데 상황이 B로 바뀌었다면 그에 맞춰 A1을 고집하지 않고 B1으로 반응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영어로는 'flexibility, adaptability'라고 하는데, 환경에 잘 적응하는 능력 혹은 유연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연하게 일을 처리하고 상황에 따라 행동과 판단을 적절하게 달리하여 적응하는 일은 뇌의 전두엽(frontal lobe)1)에서 주관한다. 대뇌의 30퍼센트를 차지하는 전두엽은 무게만큼이나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다. 언어의 유창함, 충동의 억제, 집중력, 개념이나 상징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추상적 사고 능력,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 특히 중요한 능력이 사고의 유연성이다. 상황이 바뀌었을 때 이전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그 상황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것은 전두엽에 손상을 입은 환자라면 불가능하다. "우리나라의 수도는 어디이지요?"라고 물으면 환자는 "서울"이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일본의 수도는 어디인가요?"라고 물어도 환자는 또다시 "서울"이라고 대답한다. 이렇듯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이전의 상황에 머물러 있는 것을 정신 병리 용어로 보속증(perseveration)이라고 한다. 이렇듯 융통성이 결여되면 한군데에 머물러 있을 뿐,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

부러지지 않는 유연한 마음 본문 이미지 1

전두엽이 대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보니 정상적인 발달 과정도 다른 영역에 비해 가장 느리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느 나이까지는 매우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야 정상이다.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끓으면 수증기가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전두엽이 덜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놀이를 하다가 친구가 슬쩍 반칙해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고 화를 내며 엉엉 울기까지 하는 것도 전두엽이 덜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일정한 나이가 되면 융통성이 생기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다. 결국 '상식 차원에서 허용되는 생각의 유연함', '상황에 따른 적절한 처신'이 가능해진다. 이런 능력은 급박하게 변하는 현대 사회에 잘 적응하는 데 필수적이다.

맥락 파악하기

그런데 문제는 유연함에만 있지 않다. 고지식한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행간의 의미를 읽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대로만 해석한다는 것이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은 친구가 소풍날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해서 점심시간에 슬쩍 사라지려 하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어디 가?"라고 물어보니, 친구는 "응, 아까 올 때 차멀미를 했는지 속이 안 좋네. 쉬다가 올게"라고 대답한다. 잘 놀던 친구가 멀미했을 리가 없으니 그 말의 숨은 뜻을 이해하고 친구의 난처함에 공감하거나 같이 먹자고 할 수도 있을 텐데, 고지식한 사람은 "아, 그렇구나. 잘 쉬다 와"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살다 보면 말을 돌려 하거나 맥락을 파악해서 반응해야 할 상황이 생긴다. "눈치 빠른 놈은 절에 가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라는 속담처럼, 맥락을 파악해서 요령껏 대처하는 능력을 '눈치'라고 한다. 고지식한 사람은 결정적으로 눈치가 없다. 좋게 말하면 소신이 있고 명령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사람과 의사소통하기는 무척 힘들다. 직접적으로 말하기가 난감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바로 드러내기 싫어서 말을 돌려 해야 하는 상황은 매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정도를 지키는 사회에 필요한 것

답답하기 짝이 없는 정도만을 보면서 박장대소하면서도, 내심 그가 성공하길 바라는 이유는 무엇일까? 융통성이 지나치다 못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임기응변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옳은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옳은' 상황이 비일비재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합당한 대가를 치르기보다 '불가피한 상황'으로 합리화를 시도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도리어 정도만처럼 융통성 없이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을 응원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늘어나면 세상을 조금은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리라.

통계에서 신뢰도(reliability)란 어떤 일을 반복해서 시행할 때 같은 값이 나오는 정도를 말한다. 사회도 그러하다. 융통성과 자의적 해석이 지나치다 보면 신뢰도가 떨어진다. 매번 상황이 바뀌었다면서 다른 잣대를 들이대거나 해석을 달리하면, 그 값은 들쑥날쑥이다. 신뢰도가 떨어진 사회는 불안정하고,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마음도 불안정해진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자욱한 길을 따라 낯선 장소를 찾아가는 듯한 긴장감 속에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도만 같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답답하지만, 그를 이해하게 되면 적어도 다음 행동은 예측할 수 있다.

융통성은 사회적 관계라는 톱니바퀴들이 매끄럽게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와 같다. 그러나 게임의 법칙이라는 커다란 틀이 안정적으로 존재할 때 그 가치가 빛난다. 답답해 보이지만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이 존경스러운 것은 융통성을 발휘해서 쉬운 길로 빠지고픈 유혹을 참고 견디는 능력 때문이다. 고지식하게 큰 틀을 지키되 그 안에서는 자기 나름대로 융통성을 발휘해서 상황에 맞춰 적절히 속도를 조절하거나 대응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면, 세상은 더불어 살기 편한 곳이 될 것이다.

부러지지 않는 유연한 마음 - 융통성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2012. 6. 30., 해냄)